동위 효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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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위 효정제는 북위의 황족 출신으로, 534년부터 550년까지 동위의 마지막 황제였다. 고환이 실권을 장악한 후 옹립되었으며, 고환 사후에는 그의 아들 고징, 고양에게 섭정당하며 허수아비 황제 역할을 했다. 고양에게 선위를 강요당해 북제가 건국되면서 중산왕으로 강등되었으며, 이후 독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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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 문제(507~551)는 남북조 시대 서위의 초대 황제로서, 북위 황족 출신으로 우문태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재위 기간 동안 우문태의 실권 장악과 동위와의 대립으로 불안정한 통치를 하였다.
동위 효정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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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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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원선견(元善見) |
묘호 | 없음 |
시호 | 효정황제(孝靜皇帝) |
출생 | 524년 |
사망 | 552년 1월 21일 (26 - 27세) |
아버지 | 원단 |
어머니 | 호지(胡智) |
배우자 | 고황후 |
재위 | |
동위 황제 | 534년 11월 8일 – 550년 6월 7일 |
중산왕 | 550년 6월 7일 ~ 552년 1월 21일 |
연호 | |
천평(天平) | 534년 - 537년 |
원상(元象) | 538년 - 539년 |
흥화(興和) | 539년 - 542년 |
무정(武定) | 543년 - 550년 |
정치 | |
섭정 | 고환(534–547), 고징(547–549), 고양(549–550) |
가문 | |
씨족 | 원 |
2. 생애
534년, 효무제가 고환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관중으로 들어가 우문태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낙양에 황제가 없게 되었다. 이에 고환은 원선견을 황제로 옹립하고 천평으로 개원하였다. 이때 효정제의 나이는 겨우 11세에 불과하여, 실질적인 권력은 고환이 장악했다.[7] 곧 업으로 천도했다. 장안에서는 우문태가 효무제를 살해하고 원보거를 옹립하여, 효정제의 동위와 문제의 서위가 대립하게 되었다.
고환의 전횡 속에서 효정제는 고씨 일족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었다.[7] 547년 고환이 사망하자, 그의 장남 고징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고징은 효정제를 더욱 모욕하고 감시했다. 효정제는 고징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되었다.
549년 고징이 암살되자, 효정제는 잠시 희망을 가졌으나, 고징의 동생 고양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좌절했다. 550년 고양은 효정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북제를 건국하고 동위는 멸망했다.
효정제는 중산왕으로 강등되었으나, 552년 고양에게 독살당하고 세 아들마저 살해되었다. 향년 28세였다.
2. 1. 즉위 전
원선견은 524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원단은 효문제의 아들인 원익의 아들로, 명망 높은 청하왕이었다. 그의 어머니 호(胡) 공주는 효명제의 어머니인 호태후의 삼촌 호진(胡真)의 손녀였다. 원선견은 원단의 장남이었다.[7]534년, 원선견의 사촌인 효무제는 최고 사령관 고환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우문태 및 하발승과 동맹을 맺었다. 고환이 낙양으로 진군하자 효무제는 우문태의 영토로 피신했다. 원단은 처음에는 효무제와 함께 피신했지만, 곧 효무제를 버리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고환은 낙양에 입성한 후 원단에게 황제 대리 권한을 맡겼으나, 원단이 오만하게 행동하자 그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고환은 효무제를 대신할 새 황제를 찾던 중, 사촌이 황위를 계승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원선견을 황제로 선포했다. 원단은 당황하여 남쪽의 양나라로 도망치려 했지만, 고환이 그를 추적하여 낙양으로 데려왔다. 이로써 북위는 동위(효정제)와 서위(효무제)로 분열되었다.[7]
2. 2. 고환의 섭정 (534년 ~ 547년)
고환은 낙양이 서위와 양나라 국경에 너무 가깝다고 판단하여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업(鄴)으로 옮겼다.[7] 효정제는 고환의 꼭두각시였지만, 고환은 효무제를 놓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효정제를 극진히 존경했다.[7]효정제는 성장하면서 용모가 수려하고 강인하며, 돌사자를 들고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말타기, 궁술, 문학에도 능통하여, 사람들은 그를 효문제와 비교하기도 했다.
539년, 효정제는 고환의 둘째 딸을 황후로 맞이했다.
544년, 고환의 아들 고징은 최계서(崔季舒)를 효정제의 비서로 임명하여 감시하게 했다.[7] 그러나 효정제는 최계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최계서는 고징이 효정제에게 제출한 서류와 효정제가 고환과 고징에게 보낸 칙령을 종종 수정하여 문체와 내용을 개선했다. 효정제는 자주 "최계서는 나의 유모다"라고 말했다.
545년, 고환은 토욕혼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효정제에게 토욕혼 칸 모용괄려의 사촌을 후궁으로 맞이하게 했다.[7]
547년 고환이 사망하였다.[7]
2. 3. 고징의 섭정 (547년 ~ 549년)
고환이 사망하자, 그의 장남인 고징이 대장군, 상국(相國) 등 모든 직위를 물려받아 권력을 장악했다.[7] 고징은 효정제를 존중하지 않았고, 최계서를 시켜 효정제를 감시하게 했다. 한번은 고징이 연회에서 효정제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술잔을 올리는 무례한 행동을 하자, 효정제는 분노하여 "영원한 제국은 없으니, 짐[4]이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고징은 격분하여 "짐, 짐, 개 발바닥 같은 놈의 짐!"이라고 대답하며 최계서에게 효정제를 세 번 때리라고 명령한 후 자리를 떴다.이후 효정제는 순제(荀濟), 원근(元瑾), 유사일(劉思逸), 화산왕 원대기(元大器), 회남왕 원선홍(元宣洪), 제북왕 원휘(元徽)와 공모하여 고징을 제거하려 했다. 그들은 궁궐 내부에서 성 밖으로 터널을 파 황실 근위대가 통과할 비밀 통로를 만들려고 했지만 발각되었다. 고징은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효정제를 체포하고 가택 연금했으며, 공모자들은 처형했다.
547년 고환 사후, 후경이 서위에 투항했다가 다시 양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보내 후경을 진압하고, 양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했다.
549년 봄, 효정제는 고징에게 기왕(Prince of Qi) 작위와 상국(相國) 직위를 내리도록 강요받았는데, 이는 황위를 찬탈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었다. 고징은 공식적으로 이러한 명예를 거부했다.
549년 가을, 고징은 자신의 시종 란경에게 암살당했다.[7] 효정제는 고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장군(고징의 당시 칭호)이 죽었으니 하늘의 뜻이다. 통치 권력은 황실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은밀히 말했다.[8]
2. 4. 고양의 섭정 (549년 ~ 550년)
고환이 죽은 후, 그의 장남 고징이 무정 5년(547년)에 그 직위를 모두 물려받았다.[7] 고징은 최계서를 통해 효정제의 동정을 일일이 보고받게 하고, "짐은 짐이요, 개다리 짐"이라며 효정제를 모욕했으며, 최계서가 효정제를 구타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효정제는 원근, 유사일, 원대기, 원선홍 등과 은밀히 공모하여 고징을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함장당에 유폐되었고, 공모자들은 시장에서 삶아 죽임을 당했다.[7]무정 7년(549년), 고징이 노예 란경에게 살해되자, 효정제는 "대장군(고징)의 죽음은 하늘의 뜻이다. 위의 제실의 권위는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7] 그러나 고징의 동생 고양이 란경을 죽이고 사태를 수습하여 형의 기반을 물려받자, 효정제는 "저 자 또한 짐과는 상반된다. 짐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며 탄식했다.[8]
고양은 빠르게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움직였다. 8,000명의 친위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효정제에게 군사 본부가 있는 진양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양이 권력을 잡으려는 의도를 본 효정제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이 사람은 더 이상 나를 관대하게 대하지 않는구나.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고양은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진양에 본부를 설치했다.
무정 8년(550년) 1월, 고양은 효정제에게 기군 공작(齊郡公) 작위를 내리게 했다. 이 작위는 그의 형이 죽기 전에 거절했던 작위보다 약간 낮은 작위였다. 불과 두 달 후, 고양의 작위는 제(齊) 공작으로 변경되었다. 5월에는 상국·총백궤가 되었다. 한편, 고양의 측근 고덕정(高德政)은 그에게 황위를 찬탈하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550년 여름, 고양은 동의하고 예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으며, 고덕정을 예성으로 보내 이 문제를 강요하려 했다. 효정제는 고양에게 구석을 하사했는데, 이는 양위 직전의 전통적인 마지막 단계였다. 고양이 예성에 도착한 후, 고양이 보낸 반락(潘樂), 장량(張亮), 조언심(趙彥深)이 양위를 요청했고, 효정제는 이에 고양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
2. 5. 퇴위 이후
고양(북제 문선제)은 효정제를 중산왕(中山王)으로 봉하고 특별 대우를 했다.[5] 그러나 여전히 그를 경계했다. 552년경, 문선제는 태원 공주를 궁궐 안 연회에 초대하고, 그녀가 거처를 떠나자마자 자객을 보내 효정제에게 독주를 강요하여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도 죽였다. 문선제는 효정제에게 효정황제(孝靜皇帝)라는 시호를 내리고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나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문선제는 능을 파헤쳐 효정제의 관을 장강(漳水)에 던져 버렸다.[7] 효정제는 천보 2년 12월(552년 1월)에 독주로 살해되었으며, 향년 28세였다.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원단 | 북위 효문제의 손자, 청하문선왕(淸河文宣王) |
어머니 | 호씨 | 공주 |
황후 | 고황후 | 고환의 둘째 딸 |
몽용빈 | 몽용씨 | 투욕혼의 일족, 모용과려의 사촌 |
후궁 | 이씨 | 574년 사망 |
후궁 | 호씨 | |
자녀 | 원장인 | 태자 (549년 책봉, 북제 문선제에 의해 552년 살해됨) |
다른 두 아들 | 북제 문선제에 의해 552년 살해됨 |
4. 연호
연호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
서력 | 534년 | 535년 | 536년 | 537년 | 538년 | 539년 | 540년 | 541년 | 542년 | 543년 |
간지 | 갑인(甲寅) | 을묘(乙卯) | 병진(丙辰) | 정사(丁巳) | 무오(戊午) | 기미(己未) | 경신(庚申) | 신유(辛酉) | 임술(壬戌) | 계해(癸亥) |
연호 | 천평(天平) 원년 | 2년 | 3년 | 4년 | 원상(元象) 원년 | 흥화(興和) 원년 | 2년 | 3년 | 4년 | 무정(武定) 원년 |
연호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
서력 | 544년 | 545년 | 546년 | 547년 | 548년 | 549년 | 550년 | |||
간지 | 갑자(甲子) | 을축(乙丑) | 병인(丙寅) | 정묘(丁卯) | 무진(戊辰) | 기사(己巳) | 경오(庚午) | |||
연호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5. 평가 및 의의
효정제는 실권 없는 꼭두각시 황제였지만, 동위와 북제 초기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북위 황실의 후손으로서, 고환을 비롯한 고씨(高氏) 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1] 고환의 전횡으로 효정제는 고씨 일족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었다.[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효정제는 외척 세력과 권신(權臣)의 발호로 인해 몰락한 군주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진보 진영에서 강조하는 권력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활용될 수 있다. 효정제의 비극적인 최후는 권력 투쟁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계를 상기시킨다.
참조
[1]
서적
Wei Shu
[2]
서적
Wei Shu
[3]
서적
Book of Wei
[4]
문서
[5]
서적
Wei Shu
[6]
문서
[7]
서적
資治通鑑
[8]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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